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25년 객군 반란 (문단 편집) == 배경 == 1922년 [[영풍함 사건]]으로 [[천중밍]]과 [[쑨원]]이 결렬된 이후, 상하이로 피신했던 쑨원은 천중밍 토벌을 선언하고 [[쉬충즈]]를 동로토역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천중밍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운남의 양시민, 광서의 류전환을 비롯한 여러 군벌이 호응하여 7성연군, 11개 군 10만명의 부대를 조직하여 서로토역군총사령관에 취임, 천중밍을 축출하고 광저우 함락에 기여했고 국민당의 초기 군사력의 중요 기반이었다. 허나 객군이라 불리는 이들 군벌 세력은 어디까지나 광동의 풍부한 재원을 노리고 쑨원에게 일시적으로 협력한 것일 뿐 진정한 의미로 국민당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이들은 [[천중밍]], [[탕지야오]], [[우페이푸]]와 결탁하여 차차 중앙에 대한 반기를 들었고 지방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독립적인 지휘계통을 유지하며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은 지배구역에서 도박장과 아편굴을 만들어 부정한 이익을 취했으며 정부의 통제력과 재정을 악화시켰다. 그 때문에 광저우는 여전히 군인들이 할거하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군벌들의 전횡이 심하여 국민당은 1923년 3월 29일 양시민을 중앙직할진군총사령관에, 류전환을 서로토벌군총사령관에 임명하여 군정부 직할 명령계통 아래에 두었고 1924년 7월 11일 중앙정치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국민당 군사위원회 개편을 결정, 후한민, 랴오중카이 등 당의 중요 인사들을 위원에 임명하면서 당에서 군사업무를 관장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1924년 9월 5일, 대본영 군사회의는 북벌을 발표하여 행패를 부리는 군벌들을 광동 바깥으로 내보낼 계획에 착수하기도 했고 1924년 10월, 대본영은 산하의 20개 군을 건국군이라는 이름으로 재편제하여 편제를 통일하였으나 명의상으로만 통일이 이루어졌을 뿐, 여전히 각 군은 정부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24년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당에 복종하는 교군을 양성하며 혁명정부의 군권의 집중과 군제 통일의 기회를 엿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